아이가 22개월 무렵 뒤늦게 말문이 터진 후, 30개월 무렵부터 역할놀이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물컵 없이 물을 마시는 시늉 정도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상황과 대사를 스스로 만들어내며 '역할놀이'에 푹 빠져 지냅니다.
거창한 교구나 완벽한 놀이법은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아이가 던지는 엉뚱한 대사에 열심히 장단을 맞춰주다 보니, 아이의 상상력과 마음이 훌쩍 자라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오늘은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펼치는 저희 집만의 실전 역할놀이 일상과 소소한 변화들을 기록해 봅니다.

그림책 한 줄에서 시작된 상황극: "동생이 왜 울까?"
최근 저희 아이는 재미있게 읽었던 그림책의 한 문장에 푹 빠졌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 "엄마, 동생이 울고 있어요"라며 상황극의 포문을 엽니다.
제가 "어머, 동생이 왜 울고 있대요?" 하고 물어보면, 아이의 대답은 매번 바뀝니다. 어느 날은 "심심해서 운대요", 또 다른 날은 "배가 고파서요" 혹은 "속상해서요"라며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그럼 동생한테 뭐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라고 슬쩍 물어보면, 아이는 "기차 장난감을 줄 수 있어요!"라며 다정한 해결책까지 내놓습니다. "우와, 정말 착하다. 동생도 이제 심심하지 않겠네" 하고 칭찬해 주면 아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우는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기차 장난감을 양보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리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공감하게 되었나' 싶어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아이가 감독이 되는 시간: 놀이터 숯불구이와 엉덩이 구급차
역할놀이를 할 때 저는 주로 아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조연 배우가 됩니다. 저희 아이는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쪽 좁은 공간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곳에 들어가면 꼭 "엄마, 고기 구워주세요!"라고 주문을 합니다.
저는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주워 모아 "엄마가 소고기를 숯불에 맛있게 구워줄게! 화르르~ 지글지글~ 다 구웠습니다!" 하고 열심히 연기를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의자에 앉아서 먹어야지~ 냠냠" 하며 제법 어른스럽게 고기 먹는 시늉을 합니다.
길을 걷다 일부러 철퍼덕 넘어진 뒤 우는 척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얼른 뛰어가 "ㅇㅇ이 괜찮아? 어디 아파?" 물어보면 "엉덩이!"라고 장난스레 대답하고, 자연스럽게 구급차 출동 놀이로 이어집니다. 집에서 기차놀이를 할 때도 "엄마는 디젤 기차 해, 이쪽으로 가"라며 손짓하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 놀이를 주도해 나가는 힘이 제법 단단해졌음을 느낍니다.
역할놀이는 아이의 일기장: 엿보게 된 어린이집 생활
아이들과 역할놀이를 하다 보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죠. 아직 저희 아이가 인형에게 자신의 깊은 속마음이나 섭섭함을 털어놓는 단계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가끔 인형 놀이를 하다가 무심코 "선생님, 여기 청소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낮 동안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끼리 나누었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놀이로 표현한 것 같더라고요. 이렇게 아이의 역할놀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호흡을 맞추다 보면,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어떤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지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참 신기하고 귀엽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즐거운 수다의 시간
아이와 매일 역할놀이를 하며 끊임없이 리액션을 해주는 것이 솔직히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엉뚱한 대사를 주고받으며 깔깔 웃는 이 시간 덕분에 아이의 말문도 더 활짝 트이고, 자기 생각도 예쁘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고기 구워주세요", "동생이 울어요"라며 귀여운 지시를 내리는 우리 아이들. 육아 동지 여러분도 오늘 하루, 아이가 열어주는 작고 귀여운 연극 무대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거창한 교구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상호작용 시간이 될 것입니다.